최태영(崔泰永)옹은 1900년 3월 28일 생. 19세기의 마지막 해에 태어나 격동의 한국사를 헤치며 고스란히 한 세기를 살아왔다. 66년 청주대 학장을 끝으로 은퇴했지만 현역 최고령 학술원 회원인 그는 아직도 그칠 줄 모르는 정열로 학문연구에 몰두하고 있다.
황해도 은율 출신의 그는 백범(白凡) 김구(金九) 선생의 광진학교 제자. 1919년엔 일본 도쿄(東京)에서 한국인 유학생들과 함께 2.8독립선언서를 낭독했고 3.1운동 당시엔 서울과 고향에서 만세운동을 주도했다.
조국잃은 설움을 학문에 대한 열정으로 바꿔 일본 메이지(明治)대에서 법철학, 상법을 공부, 보성학교 법과 교수, 부산대 인문과학대 학장, 서울대 법대 초대학장, 청주대 대학원 원장 등을 거치며 법학 발전과 후진양성에 젊음을 바쳤다.
8일 오후 인천시 중구 율목동 4층짜리 연립주택 2층 그의 방에서 그와 마주했다.
난방을 하지 않아 한기마져 느껴지는 5평 남짓한 방은 온통 책과 자료로 둘러싸여 있어 방문객은 앉기마저 옹색할 정도, 그는 15년전 서울에서 인천으로 이사와 외아들(75, 의사)가족과 함께 산다.
부인은 25년 전 먼저 세상을 떠났다.
우리 나이로 1백세, 그러나 2시간여의 인터뷰 내내 그는 가부좌 자세를 조금도 흐트러뜨리지 않았다.
지난 가을만 해도 책보자기를 손에 든 채 인천에서 서울 종로까지 전철로 왕복하며 강연과 토론을 즐겼다.
서울 YMCA를 찾은 젊은이들에게 "이완용 등의 친일파와 식민사학자들이 망쳐버린 우리 역사를 바로 잡아야 한다"고 포호하던 그다. 몇달전 강연 도중 쓰러진 뒤로 이젠 거동이 쉽지 않지만 그의 눈빛은 아직 30대 젊은이 못지 않게 형형하다.
"울직이기 어렵다 사양해도 떠메가다시피해 강연을 청하는 후배들이 아직 있소. 그들에겐 내 힘이 미치는 한 최선을 다해 강연합니다." 한국 법학계의 태두로 일가를 이룬 그이지만, 만년의 그는 '한국 상고사(上古史) 연구자'임을 더욱 자임한다.
그의 '제대로 된 우리 역사'에 대한 고집이 탄생시킨 역저가 지난 90년 출간한 '한국상고사', '단군은 신화가 아니라 사실(史實)"이란 명제에서 출발한 그의 '탈식민지 사관론'에 대한 열정은 지금도 식을 줄 모른다.
자료수집을 위해 일본, 중국 등으로 내달리던 정열 그대로 그는 이제 마지막 작업에 매달리고 있다.
연문판 새 한국통사 발간작업, 하나하나 자료를 들어 설명해보이며 "현재 탈고단계이니 2002년 월드컵땐 외국인들에게 배포할 수 있을 것"이라고 말하는 그의 환한 얼굴은 3세기를 사는 젊은이의 얼굴, 바로 그것이었다.
최재희 기자, 중앙일보, 오늘의 뉴스, 1999. 4. 10(토) 11:54 a.m. 편집